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넑두리 하나 - 생존

이민 초기, 이곳 씰리콘 밸리의 윈체스터 대로에 위치한 커다란 이탈리언 쌘드위치 레스토랑에서 가장 말단인 단 한 명의 뻐스보이(Busboy)로 식당 내외의 청소를 겸한 각종 접시 닦는 막일을 하면서 꼭두새벽부터 하루종일 비지땀을 흘린 후, 초라한 자전거를 몰고 기우뚱거리며 퇴근하곤 하던 일상을 밑도 끝도 없이 허구한 날 반복하던 어린 나는 일찍부터 그 모든 것을 몽땅 스스로 철저하게 책임져야만 하는 그 현실이라는 인생 수레바퀴의 중압감을 잔뜩 버거워하고 있었다.

거기서 겨우겨우 버는 한달 봉급으로는 장래에 대한 아무런 보장도 없었고 꿈에도 그리던 학업 지속에 관한 그 어떤 일말의 희망도 없었다. 그 돈에서 각종 세금을 제하고 나서 한달치 아파트 임대료와 전기비와 전화비를 내고 쌀 한 포대와 간장 한 병과 고추장 한 병을 사놓고 나면 거의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매혹적인 미국 영화의 원산지인 할리웃이 위치해 있는 바로 그 화려한 가주(California)에 살면서도 내게는 그 흔한 TV마저도 한 대 없었다. 그저 전혀 알아듣지도 못하는 영어로 된 소리만 시도 때도 없이 마구 토해내던 조그만 고물 라디오 한 대가 전부였다.

아침은 그냥 찬 물 한모금으로 얼른 때우고, 점심은 식당의 마음씨 곱고 얼굴 예쁜 백인 아줌마가 최대한으로 커다랗게 싸주는 밑볼(Meatball) 쌘드위치 곱배기와 시원한 콜라 한 컵으로 포식하고, 저녁은 간장과 고추장에 비빈 찬 밥만을 맹물과 함께 뚤린 목구멍으로 푸욱푹 쑤셔넣기 일쑤였다. 따라서 식당에서의 무료 점심이 내게는 극도로 중요한 주식인 셈이었다. 그녀는 항상 손 한뼘보다 약간 더 긴 하얀 후렌치 빵(French Bread)에다가 시뻘건 토메이도 쏘쓰(Tomato Sauce)에 푸욱 삶아진 커다란 밑볼을 단 세 개가 아닌 여섯 개씩이나 꽉꽉 장착해주곤 했다. 그리고 그건 늘 엄청 맛있었다. 다행스럽게 허구한 날 먹어도 전혀 싫증이 나지 않았다.

나는 단한번도 그녀에게 그렇게나 비싼 밑볼을 그렇게나 많이 넣어 달라고 특별히 부탁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늘 알아서 그렇게 넉넉하게 챙겨주었다. 그녀는 매일같이 늘 똑같은 뚱뚱이 밑볼 쌘드위치만을 먹는 나의 항상 배고픔을 이미 잘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처럼 천하디 천한 막일(Manual Labor)을 하는 사람마저도 자상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잘 보살필 줄 아는 진정으로 겸손하고 또한 고마운 천사였다. 내게 주어졌던 점심 시간인 단 30분 안에 그렇게나 항공모함처럼 커다란 음식을 몽땅 다 해치우기란 여간 빠듯한 작업이 아니었다.

매일같이 그렇게나 큰 음식 덩어리를 마구 쪼개대는 나를 보니까 본전 생각이 났던지, 멋진 갈색 콧수염(Mustache)을 기르던 호리호리한 젊은 백인 식당 매니저는 거의 매일 식당의 한쪽 구석에서 전혀 한눈도 팔지 않고 그저 바삐 게걸대는 나를 향해서 일정한 시간만 경과되면 자신의 손목 시계를 탁탁 치고는 했다. 마치 미식 축구(Football)의 쿼러백(Quarterback) 같았다. 딱 5분 남았다는 수신호였다. 허나, 나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소가 닭을 보듯 하였다. 시간이야 얼마가 걸리든지 그 아까운 것을 몽창 다 해치워야만 했다. 처절한 생존 투쟁이었다.





넑두리 두나 - 절망

한번은 그달의 모든 생활비를 다 제하고도 내 수중에 약 5불 정도가 남게 되었다. 지금은 이곳 주유소에서 대개 한 갤런(약 3.8리터)당 거의 3불이나 하는 깨스(Gas 즉 Gasoline 즉 휘발유)가 그 당시에는 단돈 40전 정도 밖에 하지 않던 시절이었으니까, 그 돈이 사실 그리 작은 액수는 아니었다. 아주 포근했던 주말 오후, 큼지막한 시내 지도를 한 손에 들고 전용 자전거를 몰았다. 근처의 극장까지는 이리 꼬불 저리 꼬불 하면서 대략 1시간이나 걸렸다. 그 거금 5불을 눈 딱 감고 한꺼번에 몽땅 미련없이 쾌척하며 제일 커다란 종이통에 든 구수한 버러드 팦콘(Buttered Popcorn)과 시원한 대짜 코욱(Coke 즉 코카 콜라)까지 사들고는 그냥 화면만 봐도 재미있는 그런 최신 영화 한 편을 느긋하게 감상했다. 아, 속 편한 미국 생활이란 게 바로 이런 것이로구나.

참으로 오랜만의 망중한이었다. 그러나 극장을 나서면서 곧 당황하고 말았다. 환하던 바깥은 그 사이에 아주 캄캄해진 것이었다. 돌아갈 길을 제대로 찾을 길이 막막했다. 아무리 가로등이 즐비하다고 하더라도 자동차 전조등의 빛을 받아야만 밝게 보이도록 특수하게 고안된 많은 도로명 표지판들은 어둠 속에서 자전거를 타고 있던 내게는 거의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헤맸다. 당연히 헤맸다. 아주 오래 헤맸다. 길 잃은 어린애의 심정이었다. 무사히 되돌아오는 데 무려 3시간이나 걸린 나로서는 도저히 웃지 못할 그런 피곤하고 뼈아픈 암흑의 경험이었다.

아무튼, 내 개인 생활에도 도저히 한치 앞이 안보였다. 반드시 변화가 필요했다. 그러나 너무나 막막했다. 그 당시만 해도 이곳 씰리콘 밸리에 우리 한국 교포들이나 그들이 운영하는 사업체는 거의 없었으므로 영어는 필수였다. 한국에서 학교 영어를 장장 6년 이상이나 배웠지만 그것은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여기서는 전혀 다른 영어 발음 체계가 통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단 한마디의 말도 듣지도 그리고 하지도 못했기 때문에 그 한심한 상태로 더욱 좋은 직장을 잡는다는 것은 대단히 불가능한 한낱 허황된 꿈이었다. 말도 전혀 통하지 않는 귀머거리와 벙어리에게 덜컥 그럴싸한 일자리를 내줄 만큼 머리가 한참 모자라는 그런 고용주는 아예 없었다.

번민했다. 그냥 무조건 부딪치기로 했다. 떨리는 목소리로 마구 부서진 영어(Broken English)를 사용하며 떠듬떠듬 결근 전화를 하고 나서 쌘 호세 일간지를 하나 사왔다. 구인란(Employment Ads Section)을 펴니 깨알같은 영어로 빡빡하게 쓰여진 각종 구인 광고들이 신문지 전면으로 무려 사오십 페이지나 되었다. 영한 사전을 손에 들고 하나하나 차근차근 미국을 배워나가기 시작했다. 방도 하나 없던 2층 스튜디오(Studio) 아파트는 초여름의 이글거리는 태양열과 내가 뿜어대는 열불로 인하여 온종일 정말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우리 동네에는 직종도 엄청 다양했고 일자리도 엄청 널려 있었다. 허나, 영어 회화 능력의 부재로는 거의 절망적이었다.






넑두리 세나 - 광고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 모양이었다. 문득 큼지막하게 쓰여진 시원스러운 구인 광고 하나를 접했다. 거의 생소한 영어 단어들로 꽉 차 있었다. 그래도 기죽지 않고 부지런히 사전을 뒤적거렸다. 영어 못해도 좋음. 공부 안했어도 좋음. 경력 필요 없음. 모든 전문 훈련 다 시켜줌. 훈련 중에도 충분한 봉급 지급함. 공짜 숙식도 제공함. 공짜 건강 보험과 공짜 치과 보험과 공짜 생명 보험은 물론 공짜 세계 여행도 가능함. 근무만 잘 하면 대학 공부도 다 공짜로 시켜줌. 이상스러웠다. 커다란 전화 번호만 하나 달랑 있을 뿐, 회사 이름과 직종은 커녕 아무런 주소도 하나 없었다. 요상한 냄새가 솔솔 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호기심이 발동했다.

믿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전화를 했다. 하도 말을 떠듬거리니까, 대뜸 내 주소와 전화 번호만 얘기하라고 아주 천천히 주문했다. 통화가 끝났다. 무지 얼떨떨했다. 잠시 후, 아무도 찾을 사람이 없는 내 스튜디오의 얇은 문을 누군가가 쾅쾅 두드리기 시작했다. 말끔한 예복을 갖춰 입은 군인 한 명이 내게 멋지게 거수 경례를 하고 있었다. 나는 어처구니없는 본의아닌 실수를 한 것을 직감하고는 얼른 문을 꽉 닫았다. 문고리까지 채웠다. 그러나 그는 끈질겼다. 계속 두드려댔다. 문은 다시 열렸고 얘기는 계속되었다. 하지만 나는 군 입대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사탕발림 손짓 발짓이 내게는 모두 소 귀에 경 읽기였다. 그러나 그 육군 모병관(Army Recruiter)은 막무가내였다. 바로 몇 달전에 사이공이 함락되며 월남전이 막 끝난 시점이었기 때문에 미국 군대에 자원하는 장정은 극히 드물었다. 하다못해 예를 들어, 과거의 미국 식민지였었던 휠리삔즈(The Philippines)의 마닐라 시내에서 원하는 현지인의 손에 진짜 미국 영주권을 직접 쥐어주면서까지 미군 현역병을 모집하기도 했던 그런 다소 급박한 상황이었다. 그런 식으로 일정한 외국에서 직접 현지 입대한 미국 군인들을 그 당시 실제로 꽤 많이 목격했다.

그러니, 그가 찰거머리같은 언행을 하는 것이 어쩌면 아주 당연스러웠는 지도 모르겠다. 온갖 감언이설로 나를 설득하려 해도 도저히 안되니까 결국은 그냥 깨끗하게 철수했다. 그 집요한 친구가 사라지고 나니, 나도 속이 아주 후련했다. 그리고 아주 끝난 줄 알았다. 참으로 한심한 오판이었다. 그에게는 나중에 나를 더욱 집중적으로 공략하기 위한 기상천외한 그러한 상자 밖의 복안이 하나 더 있었던 것이다. 혼자서 살고 있던 나는 그에게는 아주 훌륭한 먹이감이었다.






넑두리 네나 - 입대

좁은 스튜디오 내부에 소중하게 놓여 있던 자전거로 미루어보아 내가 아직 차가 없다는 것을 슬쩍 간파한 그는 그로부터 정확하게 일주일 동안 나의 식당 출퇴근 시간에 맞춰서 귀신같이 나타나서는 기꺼이 개인 운전사 노릇을 했다. 저녁마다 퇴근길에는 그럴싸한 식당으로 안내해서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사주기도 했다. 아무리 내가 코웃음을 쳐도 그의 극진한 대접은 꾸준히 계속되었다. 지성이면 감천이었던지, 나도 그 친구에 대하여 약간씩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결국 급기야는 일단 지능 지수 검사(Intelligence Quotient Test)만 한번 하기로 했다. 분명히 영어로 되어 있을 테니 그냥 자연스럽게 망쳐주기만 하면 되는 비교적 간단한 문제라고 판단했다. 다소 심각한 오판이었다. 분명히 미국에서 치루어지는 지능 시험이었지만 어인 일인지 영어는 별로 없고 대개 그냥 교묘한 그림과 숫자만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내 개인 양심상 도저히 답안을 틀리게 작성하기도 싫었지만, 그냥 일부러 틀린 답안을 고르는 작업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행인지 불행인지, 그냥 가뿐하게 통과되었다는 언질만 그 자리에서 직접 통보받았다. 최저 합격 수준이 엄청이나 낮았던 모양이다. 그 간단한 시험 결과로 인하여, 어리석은 일이었지만, 사실 오랫만에 미국 생활에 대한 약간의 자신감이 붙기도 했다. 그런데 바로 이것 때문에 나는 나중에 미국 군대에 의하여 거의 꼼짝없이 양쪽 발목을 꽉 잡히고야 만다.

거의 엉겁결에 오클런드의 모병 부대로 향하게 된 나는 하얀 패니즈(Panties)만 걸치고 꽤 많이 모인 흑백 장정들 틈에서 간단한 신체 검사를 받았다. 물론, 현역(Active Duty) 합격 판정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영어를 아주 잘 하는 한 한국인 장정을 만났다. 그와의 대화 과정에서, 내가 그 모병관에게 감쪽같이 속았다는 것을 알았다. 나한테는 다양한 희망 병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고사하고 사전 자율 선택권에 관한 일체의 언급도 없이 자신이 약간의 특별 상여금을 더 타먹기 위하여 영어도 한마디 못하던 나를 거의 모두가 꺼리고 피하던 총알받이 보병(Infantryman)으로 몰아부친 것이었다. 다행히 그 한국인 친구의 유창한 영어 해명으로 인하여 그 문제는 의외로 간단히 즉석에서 해결되었다. 미국 군대 조직이 완전한 벽창호는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여간, 미국 이민 단 6개월 만에 있었던 나름대로의 각종 우여곡절 끝에, 미국 중부 미조리주의 레오나드 우드 요새(Fort Leonard Wood)에 도착한 나는 6주간의 기초 전투 훈련(Basic Combat Training)에 돌입했다. 말을 한마디도 하지 못하던 관계로 그냥 남들을 따라서 눈치로만 매사를 어정쩡하게 하기 시작했다. 긴 머리와 사복 차림의 우리들을 대뜸 구내 이발소로 데리고 가서는 각자가 원하는 대로 간단한 이발을 하라고 했다. 개인적인 완전 삭발 충격을 최대한으로 줄여주려는 배려가 깔린 고도의 심리 작전이라는 것을 우리는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런고로 완전히 빡빡 밀어버리는 친구는 당연히 단 한 명도 없었다. 마침내 군복과 군화를 지급받고서는 사복을 벗고 사물을 챙겨서 소포 포장을 했다. 다들 시무룩했던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다.





넑두리 다나 - 악마

잠시 후, 우리가 군복을 입자 마자 그 갈색 카우보이 모자를 멋지게 눌러쓴 마음씨 한없이 좋게 생겼던 백인 훈련 교관(Drill Sergeant) 보애즈는 느닷없이 태도를 돌변했다. 마치 밋밋하던 흑백 화면이 화려한 칼라 화면으로 바뀐 것 같았다. 정신이 번쩍들 들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의 세련되게 절제된 총천연색 성깔이 드디어 하나하나 다분히 논리적으로 삐져나오기 시작했다. 갓상경한 촌놈들처럼 마냥 어리둥절하고 어설프기만 했던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사사건건 말이 되게 물고 늘어졌다. 우리는 군복을 입고 군화를 신었지만 역시 아직 진짜 군인은 아니었다. 앞으로 배울 것이 많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군인다운 군인을 만들기 위해서 나름대로 엄청난 악을 바락바락 쓰고 있었다. 바로 코 앞에서 쉬지 않고 시끄럽게 으르렁거리는 한마리의 무서운 호랑이였다. 전형적인 미군 훈련소 영화의 한 장면과도 정말로 꼭 같았다.

우리는 그날 오후 급기야 다시금 같은 구내 이발소로 끌려가서는 모두들 순식간에 아예 까까중이 되는 수모를 당했다. 이번에는 무조건 그냥 화악 밀어버리는 단순 작업이었으므로 한명 당 대략 1분 정도 밖에 안걸렸다. 마치 통조림 공장의 이동 작업대 위에 놓인 빈 깡통들처럼 길게 줄서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나이 지긋한 민간인 이발사들은 같은날 같은 머리로 결코 싸지 않았던 개인 이발료를 꼬깃꼬깃한 현찰로 두번씩이나 챙기면서 회심의 미소들을 짓고 있었다. 일반 사회에서의 모든 자존과 품위와 인격과 체면이 그냥 맥없이 뭉텅뭉텅 의자 밑으로 떨어지는 그 알량한 머리카락들과 함께 모두 일시에 동반 추락하고 말았다. 나도 물론 마찬가지였지만, 거의 다 히피처럼 길던 머리들이 모두들 하나같이 반들반들한 사막 언덕으로 변했다. 그 허탈하고 황량한 심정을 한순간에 강제적으로 당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잘 모를 것이다. 상당히 허했다.

젊은 드릴 싸전트 보애즈는 거의 완벽하게 준비된 질긴 악마였다. 그가 바로 코 앞에서 바락바락 악을 쓸 때마다 그의 커다란 입에서 마구 튀기는 작은 침방울들과 함께 그의 잔뜩 부릅뜬 두 눈망울도 그냥 한꺼번에 밖으로 튕겨나올 것만 같았다. 총체적인 공포 그 자체였다. 그러나 육체적인 공포는 거의 없었다. 아무리 개인적으로 화가 나더라도 직간접적으로 절대로 손찌검을 하는 경우는 전무했다. 체벌도 아주 단순하게 단 한가지였는데, 거의 누구나 할 수 있는 기초 체력 단련 즉 엎드려 팔굽혀 펴기(Push-Up) 스무 개가 고작이었다. 누구든 수시로 당했다. 껄떡하면, 김 미 투어니!(Give me twenty!)였다. 웬만한 특별 사항이 아닌 이상, 단체 기합은 거의 없었다. 그러한 단체 기합에 대한 개념조차도 아예 전무한 것처럼 보였다.

여담으로, 미국 육군 사병 복무 3년 동안 상관이나 상급병의 손찌검이라는 것은 전혀 듣도 보도 못했다. 개인의 인격을 최대한으로 존중할 줄 아는 현명한 조직이었다. 아무리 꼭지가 도는 지경을 당하더라도 절대로 매를 들지 않고 우선 말로 해결하는 편이었다. 말로만 해서는 안될 중대 사항 위반에 대해서는 아리클 휲틴(Article 15)이라는 다소 버거운 형벌을 흔하게 내렸다. 한번 받을 때마다 그달치 봉급의 25%씩이 꼼짝없이 깎여나가는 제도였다. 그런 거 한두 개 내지는 서너 개 받은 녀석들은 봉급날만 되면 돈 꾸러 다니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실탄이 장전된 권총을 찬 담당 장교가 나눠주는 현찰 봉급 지급 현장에서 그저 아무나 붙잡고 통사정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백인이고 흑인이고 간에 그런 식으로 꿔준 돈은 단한번도 되돌려 받아본 적이 없다. 변 보기 전과 변 보고난 후가 그렇게 다를 수가 없었다. 확실하게 서명된 계약서가 수중에 없는 이상, 그들은 완전 오리발이었고 따라서 거의 속수무책이었다. 돈 내고 배운 현실이었다.

아, 또하나의 체벌이 있었다. 좀 특이한 것이었다. 우리 훈련 소대 내무반 복도에 코카 콜라 등 각종 시원한 탄산 음료를 원하는 대로 뽑아 마실 수 있는 커다란 동전 판매기가 있었는데, 첫 2주간은 아무도 손을 못대게 했다. 단물에 대한 일종의 자발적인 극기 훈련이었다. 그런데 그게 참말로 참기 힘든 체벌 중의 하나였다. 마시지 못하게 하니까 더욱 더 마시고 싶으면서도 과연 아무도 감히 손을 대지 못했다. 악착같은 드릴 싸전트 보애즈가 재고량 검사를 위해서 수시로 그것을 연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시끄러운 입만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고 날카로운 이빨까지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은 사나운 발톱과 살벌한 이빨 때문에 호랑이를 무서워하는 것이지 괜히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다. 마침내, 그 단물 극기 기간이 끝나던 날은 내무반이 온통 감격적인 난장판의 도가니였다. 단물의 위력은 대단했다.






넑두리 여나 - 훈련

영어 귀머거리에 영어 벙어리였던 나는 애초부터 거의 완벽한 소위 고문관의 소질을 다분히 내포하고 있었다. 고머 파일이라는 극도로 웃기던 이곳 미국의 옛날 흑백 TV 카미디(Comedy) 연속극 중에서의 아주 유명한 고문관 졸병이 하나 있었는데, 그게 바로 영락없이 그 당시의 나였다. 거의 항상 남들보다 한두 박자가 늦었다. 동료들의 흉내를 내느라고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눈치로만 먹고 살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때로는 용감하게 나홀로 따로 움직이기도 했다.

왼쪽으로 가라면 오른쪽으로 가고 뒤로 가라면 앞으로 가는 식이었다. 물론, 일부러 그러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해도 참말로 한심하고 우스웠다. 과거의 학창 시절 여름 방학 때 스스로 자원하여 서울의 남한산성 밑에서 그토록 힘든 한국 특전사 공수 훈련을 그것도 훈련 소대장으로서 이미 받았던 실한 경험이 있었지만, 우선 영어로 된 각종 명령들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던 나로서는 훈련 중에 으례 혼자서 엉뚱한 짓을 하기가 일쑤였다. 뾰족한 대책이 전무했다.

그리하여 나는 사사건건 본의아니게 훈련 소대원들에게 작은 웃음거리를 제공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실실 웃으면서 나름대로 느긋하고 태연하려고 노력했는데, 바로 이 작은 자존심이 그만 그 악명 높은 드릴 싸전트 보애즈의 불편한 심기를 처음부터 단단히 건드렸던 것 같다. 말도 제대로 안들으면서 비실비실 웃기만 하는 말썽꾸러기 훈련병을 좋아할 교관은 없었다. 물론, 그는 적어도 한동안 나의 그러한 언어 불통으로 인한 답답한 속사정을 전혀 알 리가 없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시도 때도 없이 아주 크게 짖어대야 하는 예써!(Yes, Sir!)나 노써!(No, Sir!)와 같은 간단한 영어 대답 만큼은 남들처럼 기가 막히게 시원스럽게 잘했기 때문이다.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으면서도 내 대답은 우선 무조건 우렁차고 유창했다. 답은 분명히 둘 중에 하나였으므로 비결은 간단했다. 나로서는 순간 생존을 위한 마지못한 입부림이었지만, 정확할 확률은 무려 50%나 되었다. 상대방이 장교이고 동시에 상급자일 경우에만 남자에게는 써(Sir) 그리고 여자에게는 맴(Ma’am)을 거의 모든 말끝마다 붙이게끔 되어 있었지만, 모든 훈련병은 하사관인 드릴 싸전트에게도 그렇게 깍듯이 대해야만 했다. 그것도 중요한 훈련의 일부였다.

한번은 땅에 엎드려서 대형 무반동 기관총인 M-60를 직접 쏠 차례가 되었다. 총도 컸고 총알도 컸다. 작은 대포처럼 컸다. 쏘기 위해서 총알을 장착하는 방법도 꽤나 복잡하고 까다로웠다. 이걸 저리 젖히고 저걸 이리 내리꼽고 이걸 돌리고 저걸 박아서 이걸 내린 다음에 저걸 뽑고 이걸 맞춰서 저걸 올리고 방아쇠를 당겨야 하는 식이었다. 물론, 나는 장황한 설명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곧 이어진 교관의 시범을 봐도 전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쏠 수 있는가? 예써!

기죽지 않고 태연하게 이것저것 움직이며 최선을 다하고는 힘차게 방아쇠를 당겼다.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았다. 교관은 설명과 시범을 반복한 후에 다시한번 사격 기회를 제공했다. 또다시 나름대로 열심히 흉내를 냈다. 역시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았다. 진득한 흑인 교관도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았다. 한심하다는 듯이 고개만 설레설레 젓고 있었다. 상등신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냥 김 미 투어니만 하고 가라고 했다. 쉬운 총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거의 말이 필요하지 않은 훈련도 있었다. 월남전이 막 끝난 시점이었기 때문인지, 적진에서의 생존 방법을 가르쳐준답시고 허연 중닭 한마리를 가져왔다. 백인 교관은 그 퍼득대는 꼬꼬를 전혀 소리내지 않고 잡아먹는 방법이 무엇이겠냐고 우리에게 물었다. 아무도 대답을 못했다. 순간, 그는 느닷없이 안고 있던 닭의 길다란 목을 꽉 물어뜯으며 휙 던져버렸다. 갑자기 목이 달아난 닭은 그래도 퍼득거리며 잠시 뛰어다녔다. 그 닭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 저쪽 구석에서 조용히 비참하게 침몰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우리는 모두 끽소리도 못했다.





넔두리 이나 - 시련

나는 드릴 싸전트 보애즈에게 단단히 찍힌 것이 거의 분명했다. 도대체 어인 일인지, 우리 훈련 소대(Platoon) 내의 각종 궂은 일은 거의 다 항상 내 몫이었다. 허구한 날 나는 막사(Barracks) 내의 변소(Latrine) 청소를 해야만 했다. 그 많은 수세식 변기에 단 하나라도 누런 오물이 묻어 있기라도 하면 금방 난리가 났다. 그는 잘 보이지도 않는 먼지 하나까지도 집게 손가락으로 꼭꼭 찍어내는 엄청나게 꼼꼼한 집중력으로 변소 청소 검사를 아주 구석구석 야질이 하고는 했다.

그래서 나는 나중에는 쓰던 칫솔까지 동원하여 하얀 변기의 모든 구석구석을 번질번질하게 갈고 닦는 나만의 묘술을 터득해야만 했다. 그러나 극도로 깐깐하던 그에게는 도대체 흡족이라는 것이 없었다. 항상 트집을 위한 트집을 잡았다. 그리하여 나의 동일 변소 청소 작업 반복은 거의 매일 저녁마다 제대로 편히 쉴 시간도 없이 지겹도록 계속되었다. 마치 우리의 유명한 설화 소설 콩쥐팥쥐전 속에서 온갖 수모를 겪는 나어린 주인공 최콩쥐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야릇했다.

하지만 나는, 정상적인 영어를 거의 전혀 못듣고 못한다는 자신의 치명적인 모자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일언반구의 불평이나 불만도 없이 그저 묵묵히 어떠한 궂은 일이라고 하더라도 일단 시키면 다했다. 다른 동료들은 뺀들뺀들 한가한 휴식을 취하고 있었지만, 나는 다소 서러운 마음을 달래면서 이를 악물고라도 주어진 별도 임무를 철저하게 완수했다. 그 당시 한국으로 치면 무더운 삼복 더위 중이었지만 마냥 흘러내리는 온몸 비지땀을 채 느낄 겨를도 없었다.

심지어는, 야영 훈련 즉 비부액(Bivouac)을 나가서도 야외 간이 변소 마련을 위해 그 딱딱한 맨 땅을 야전삽 하나만으로 어깨 넓이로 좁고, 키 높이로 깊고, 대여섯 명의 장정들이 동시에 길다란 나뭇가지에 꽁지 내민 닭들처럼 걸터앉아서 대변을 볼 수 있을 정도로 길게, 나홀로 묵묵히 직사각형 구멍을 파야만 했다. 나중에 철수할 때가 되면 그 냄새 진동하는 커다란 똥 구멍을 퍼낸 흙으로 다시 말끔하게 메꿔야만 했다. 지독한 중노동이었다. 거의 완벽한 고문관 대우였다.

더군다나 무덥디 무더운 삼복 지경에 그러한 고된 막노동을 했으므로 전신이 완전히 비지땀 범벅이었다. 시원한 야외 샤워는 커녕 어쩐 일인지 하루종일 마실 물도 제대로 공급되지 않았다. 마침 대대 물차가 고장난 모양이었던지 어둠이 깔릴 무렵이 되어서야 약간의 물이 배급되었다. 일인당 철모 한 바가지의 물이 전부였다. 겨우 그것으로 모든 걸 다 해결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황당했다. 이것도 생존 훈련인가? 어찌하면 이걸로 다 해낼 수 있을까? 잠시 생각해야만 했다.

우선 양껏 마셔서 갈증부터 해소했다. 남은 물로 드디어 나홀로 작업에 들어갔다. 이도 닦고 면도도 하고 세수도 하고 전신 목욕도 했음은 물론 머리까지 감았다. 까까머리여서 그랬는지 일도 아니었다. 비누칠까지 했다. 달밤에 홀딱 벗고 체조하는 격이었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일단 닥치니까 다 할 수 있었다. 겨우 그걸로 나처럼 목욕까지 한 녀석은 없을 꺼라고 생각했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비좁은 A-텐트 안에 누웠다. 우선 몸이 끈끈하지 않으니 정말로 시원했다. 그러나 천근 만근이었다. 그제서야 삭신이 푸욱푹 쑤셔대기 시작했다.

시련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잦은 사격 훈련 후의 저녁 시간에는 늘 다들 각자의 M-16 소총을 분해하여 총기 내부에 낀 검댕을 말끔하게 소지해내곤 했다. 전투에서의 목숨 부지와 직결되는 심각한 작업이었다. 그래야만 뜻하지 않은 불발을 예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총기 분해 청소를 다 끝낸 후에는 반드시 검사를 맡아야 드디어 잠을 잘 수가 있는데 드릴 싸전트 보애즈는 내 것은 잘 보지도 않고 거의 매번 무조건 불합격시켰다. 심보가 고약한 사람이라는 판단만 섰다.

나중에는 나만의 꽁수를 부려서 분해된 소총을 끓는 물에 팔팔 튀기기까지 했다. 그래도 역시 불합격이었다. 최선을 다하던 나로서는 과연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한심한 고문관 처지를 잘 아는 나로서는 결코 힘들거나 싫은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실은 그러한 일종의 와신상담 와중에서도 한때 너무나 힘들고 고달퍼서 그냥 모든 것을 일시에 다 포기하고 일반 사회로 복귀하려고 한번은 내 나름대로 마음 약한 어설픈 잔꾀를 부려보기도 했다.







넔두리 더나 - 충격

어느날 초현대식 삼층 벽돌 막사 앞에서 새벽 점호를 하는데 딱 한 명이 모자랐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드릴 싸전트 보애즈는 다시한번 점호를 지시했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바로 그 텍사쓰에서 온 늘상 빈둥거리기만 하던 느끼한 백인 녀석이었다.

어두운 꼭두새벽부터 느닷없이 드르륵드르륵 울려퍼지는 철제 침대 머리맡들이 대걸레 자루에 박박 긁히는 시끄러운 소리와 드릴 싸전트 보애즈의 기상 독려 발악 소리에 화들짝 놀라 일어나서 급히 눈꼽 비비며 주섬주섬 군복을 입으면서 보니까, 내 건너편의 한 녀석이 갈색 군용 담요가 덮힌 하얀 침대보 밑에서 아직도 열심히 잠을 청하고 있었다.

아니, 그냥 자는 척만 하고 있었다. 야 너 안 일어날 꺼야 하고 내가 서툰 영어로 약간 걱정이 되어서 물었다. 그 녀석은 내게 엷은 미소와 함께 살짝 윙크를 하고는 그냥 다시금 눈을 푸욱 감았다. 놀라운 강심장이었다.

그 점호 즉시로 흑인 부관 하나가 내무반에 들어가서 상황 파악을 하고 나왔다. 어떤 녀석이 개인용 철제 장롱(Steel Cabinet) 속에 그 열쇠를 집어넣고는 잠궈버려서 입을 군복이나 신을 군화가 아예 없는 고로 일어나 봤자 아무런 소용도 없다고 아직도 천연덕스럽게 자고 있다는 것이었다. 드릴 싸전트 보애즈는 역시 예상대로 노발대발이었으나, 점호 대열의 여기저기서는 킥킥거리는 작은 웃음 소리가 좀처럼 끊이지 않았다.

아무리 튼실한 자물통이더라도 단번에 싹둑 자르게끔 고안된 무식하게 생긴 커다란 특수 금속 절단기가 어디에선가 급히 동원되었고, 결국 그 녀석은 상의 단추를 잠그던 채로 거의 강제로 끌려나와서는 오히려 싱글벙글인 희한한 표정으로 김 미 투어니를 했다. 고의든 아니든 그토록 커다란 잘못을 했는데도 고작 그게 체벌의 전부였다.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그리고 또 그 다음날도 그 녀석은 시치미를 뚝 떼고서는 똑같은 황당한 짓거리를 극도로 태연스럽게 반복했다. 그 녀석의 김 미 투어니 체벌도 매일 똑같이 반복되었다. 그 녀석은 그런 웃기는 과정 중에서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마치 남들은 한껏 웃기면서도 막상 자기 자신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우스운 말만 계속하며 철저한 직업 정신을 발휘하는 노련한 카미디언(Comedian)과도 같았다.

그의 단순한 바보 짓거리는 역설적으로 오히려 상당히 고차원적인 단독 행동이었다. 결국, 그냥 조용히 집에 돌아가게 해달라는 무언의 개인 시위였다. 아닌게 아니라, 그 녀석은 어느날 저녁 간단히 짐을 싸고서는 마치 귀향하는 석양의 무법자처럼 그렇게 그냥 유유히 사라지고 말았다. 기상천외한 충격이었다. 같은날 저녁 나도 한번 약간의 용기를 냈다.

악랄한 드릴 싸전트 보애즈가 부대 밖의 집으로 아주 퇴근하고 난 틈을 타서, 나는 아예 중대 사무실로 터벅터벅 올라갔다. 당직 흑인 특무 상사 하나를 꽉 붙잡고서는 무조건 집에 가고 싶다고 외쳐댔다. 아 워나 고우 호움!(I wanna go home!)을 일부러 최대 한도로 떠듬거리면서 반복했다. 그는 도대체 왜 그러냐고 물었다. 난 영어를 몰라요!(I don’t know English!)라고 약간 엉성한 영어로 둘러댔다.

그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내 개인 신상 서류철을 얼른 꺼내서 열심히 들여다 보았다. 그런데 그의 얼굴에 한순간 빙그레 웃음꽃이 피었다. 야, 자네는 장교(Officer)도 될 수가 있는 머리야. 영어도 못한다는 친구가 영어로 된 지능 검사 성적은 왜 이리 높은 거야? 자, 싱거운 장난일랑 당장 집어치우고 곧장 막사로 돌아가서 잠이나 푸욱 자게나. 나는 그날 처음으로 그 당시의 미군 장교들은 모두 아이큐가 적어도 120 이상이라는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넔두리 아나 - 천사

그러나 사실은 나에게도 그럴싸한 한가닥 희망은 있었다. 참으로 착하고 좋은 친구 하나를 만난 것이었다. 철제 2층 침대(Bunk Bed)의 내 밑에서 자던 동료인데, 그는 어느날 저녁 문득 조그만 종이 한 장을 내게 불쑥 내밀며 싱긋 웃었다. 거기에는 그날 배웠던 새로운 영어 구령들이 깨알같은 글씨로 주욱 죄다 적혀 있었다. 나의 언어적 딜레마를 간파한 그의 따뜻하고 섬세한 배려였다. 나는 밤마다 영어 사전을 뒤적이면서 그가 적어주는 새로운 구령들을 하나하나 외워나가기 시작했다. 문득 어두운 동굴 안으로 찬란한 한줄기 빛이 들어온 것과도 흡사했다.

그는 자신이 미국 중서부의 유타주를 중심으로 한창 맹위를 떨치고 있던 아주 독특한 순전 미국판 기독교인 모몬교(Mormon Church 또는 The Church of Jesus Christ of Latter-Day Saints)의 원래 창시자인 조우짚 스미쓰(Joseph Smith)의 직계 후손이라고 친절하게 자기 소개를 했다. 그 친구의 이름도 바로 그 19세기 선조와 똑같이 조우짚 스미쓰였다. 모처럼의 주말 외출 때 그는 훈련소 근처의 모몬 교회로 나를 데려가기도 했다. 조그만 방에 놓인 커다란 원탁에 둘러앉아서 도란도란 조용히 토론하는 식으로 특이한 예배를 봤는데 극히 인상적이었다.

그는 틈만 있으면 내게 각종 영어 발음들을 아주 자상하고 정확하게 가르쳐 주곤 했는데, 내게는 역시 실전 영어 발음이 문제였던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그 독특한 걸 모르니 소리가 귀에 들릴 리도 없었고 귀에 들리지도 않으니 그걸 입으로 말할 수도 없었던 거다. 하여간 그 당시에 거의 속수무책으로 드릴 싸전트 보애즈에게서 온갖 고초를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던 내게 쪽집게식 영어 발음 도움을 주던 그는 구세주와도 다름이 없었다. 정말로 눈물이 다 날 정도로 고마웠다.

그런 식으로라도 드디어 영어 단어 하나하나를 거의 처음부터 제대로 배우는 맛이 제법 쏠쏠했다. 어떤 것은 같은 영어 단어라도 사회 발음과 군대 발음이 완전히 달랐다. 예를 들어, 차렷을 정식 영어로는 어텐션(Attention)이라고 하는데 군대 구령은 어테엔흡이었다.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그러니 나같은 초보자는 더군다나, 아무리 간단한 말이라도 누가 자세히 설명해주지 않는다면, 설사 그 잡음같은 소리가 제대로 귀에 들어온다고 해도 그게 도대체 뭔 말인지 영 알 턱이 없었다.

일단 내 두 귀가 어느 정도 그렇게 개통식을 끝마치고 나니까, 별의별 소리까지 어렴풋이나마 꽤나 들리기 시작했다. 뉴욕 사투리나 남부 사투리(Southern Accent)나 흑인 사투리 등등은 물론 각종 다양한 욕설까지도 말이다. 말마다 참으로 특이한 점이 꽤 많았다. 미국 흑인은 어느 지방 출신이고 간에 거의 다들 그들 특유의 똑같은 사투리를 사용했다. 여기저기 징그럽고 괴상스럽게 길게 늘어지는 남부 사투리는 지금도 그렇지만 정말 알아듣기 힘들었다. 뉴욕 사투리는 바싹 메마른 쾌속 따발총이었다. 그리고 의식적으로 상스러운 욕설을 거의 철저하게 삼가는 장교들과는 달리, 거의 모든 일반 사병들의 입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거칠었다.

그들은 언제든지 입만 뻥끗하면 우선 별 의미도 없는 훡으로 시작해서 훠낀이나 훠낑 또는 마더 훠꺼 등으로 한참 자신의 말을 거칠게 요리하다가는 결국 그 훡으로 끝마쳤다. 그래야만 직성이 풀리는 듯했다. 아주 듣기 싫었지만 곧 익숙해졌다. 참말로 한심한 지경이었다. 물론, 극히 드물었지만 상스러운 욕을 전혀 쓰지 않는 동료들도 간혹 한둘 있었다. 조우짚 스미쓰도 단연코 그 중의 하나였다. 욕에 관한 한, 나는 애초부터 내 산영어의 스승인 조우짚 스미쓰의 개인 언어 수칙을 철저하게 따르기로 무언중에 단단히 결심했다. 그리고 그러한 내 개인적인 결심은 군대 생활 3년 동안은 물론 오늘날까지도 거의 잘 지켜지고 있다.







넔두리 열나 - 자신

나의 본격적인 산영어 공부가 시작된 얼마 후, 드디어 드릴 싸전트 보애즈가 문득 고개를 약간 갸우뚱거리기 시작했다. 뭐든지 새로운 제식 훈련을 하나 가르쳐주면 첫날은 여지없이 개판을 치다가도 다음날부터는 똑부러지게 행동하는 나를 발견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깐깐한 눈에 나는 어디까지나 아직 걸음마 단계에 불과한 풋나기 훈련병에 불과했다.

그는 온갖 기발한 방법으로 나를 더욱 억세게 죄어들며 내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그냥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가 내게 굉장히 나쁜 감정이 많다고 내 나름대로 거의 확실하게 판단하고 있었다. 나중에 자연히 심각한 오판으로 밝혀졌지만,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던 그 당시의 나는 무척이나 단순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일부러 나는 전혀 그런 기분 나쁜 내색을 하지 않았다. 분명히 차별은 차별이었지만 어디까지나 인종 차별이 아니라 개인 차별임이 틀림없었기에 사실 속마음이 그렇게 크게 상하지는 않았다. 백인이었던 그가 내가 아닌 다른 비백인 특히 흑인을 공정하게 대하는 것을 보면 금새 표시가 났기 때문이다. 어 하면 아 하는 게 인간이다. 금새 알 수가 있었다.

그렇다. 누구든지 일단 말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을 보면 쉽사리 우습게 여길 수 있는 오판의 여지가 충분히 있다. 상대방의 무지에 기인하는 본의아닌 간단한 실수의 소치라고 간주하고 나면 마냥 불편하던 마음도 상대적으로 아주 편해지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너무 무디었나?

점차로 언어 소통 상황이 나아지는 바람에 다행스럽게도 나머지 전투 훈련 과정에 대한 일말의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우선 주변의 말이 좀 들리니까 무슨 일이라도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급기야는 비록 근시였지만 안경을 쓴 채로 M-16 소총(Rifle)의 특등 사수(Expert)가 되기도 했다.

홀가분한 몸차림으로 행해졌던 장거리 행군도 찌는 무더위 땡볕 속에서 하루종일을 걸었지만 한층 상큼한 기분으로 끝낼 수 있었다. 소금을 갖춘 물차와 구급차가 지친 대열의 뒤를 바짝 따랐다. 완전 군장 행군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중간에 쓰러진 동료들도 있었던 고된 훈련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이 한심한 고문관이 그동안 한없이 비웃기만 했던 소대원들은 물론 내게 특히나 항상 깐깐하고 모질게 굴었던 드릴 싸전트 보애즈에게 뭔가를 하나 톡톡히 보여줄 수 있는 그런 멋진 운명적인 기회가 어느날 갑자기 정말 갑자기 들이닥치게 되었다. 기회란 역시 순간적이다





넔두리 할나 - 무모

한바탕의 여름 소나기가 막 지나갔던 어느 후줄근한 오후, 그 지루하고 지겨웠던 기초 전투 훈련도 어느덧 거의 막바지에 접어 들고 있었다. 우리 훈련 소대는 사전에 아무런 예고도 없이 엄청나게 높다란 삼각형 사다리 밑에 집결하였다. 무슨 우주선 발사대 모형처럼 보이기도 했다.

상당히 매끌매끌하고 굵은 전봇대용 통나무 세 개가 세 윗꼭지가 한데 잘 맞춰져서 약간쯤 비스듬하게 하늘 높이 수직으로 세워져 있었다. 족히 사오층 건물 높이는 되어 보였다. 그리고 어른 키 하나 만큼의 넓은 간격으로 굵은 통나무 난간들이 밑에서부터 꼭대기까지 수평으로 단단히 묶여져 있었다. 거인 걸리버의 사다리와도 같았다. 그런데 아무런 안전 장치도 없었다.

굵은 통나무 난간에 맨손으로 매달려서 그냥 하나하나 원숭이처럼 재주를 넘으면서 다음번 난간으로 올라가다가 중간에서 떨어지면 아예 죽거나 크게 다치는 그런 무모한 극한 상황이 설정되어 있었다. 우선 전문 훈련 교관 하나가 멋지게 시범을 보이며 꼭대기까지 단숨에 올라가서는 밧줄에 매달린 도르래를 타고 저 멀리 건너편 지점으로 매끄럽게 활강해 내려갔다.

모두들 숨을 죽이며 조용히 구경했다. 상당히 오들오들 떨렸다. 아무도 말이 없었다. 내 손에도 땀이 흥건해졌다. 우리들 모두가 졸지에 죽음과도 곧장 연결될 수 있는 직접적인 위험에 뚜렷하게 직면해 있었던 것이다. 인간이란 역시 확실하게 닥쳐오는 죽음 앞에서는 본능적으로 잔뜩 움추리는 법인가 보다. 말이 군인이지 대부분의 우리는 아직도 다분히 어린애들이었다.

드릴 싸전트 보애즈가 갑자기 오랜 정적을 뚫으며 크게 한마디 했다. 너무나 위험하기 때문에 강제로 시키지는 않을 테니, 하고 싶은 사람만 기어오르라는 간단한 명령이었다. 한참이 지났다. 그러나 다들 아직도 조용하기만 했다. 아무도 감히 엄두를 못내는 상황이었다.

나는 맨 뒤에서 심호흡을 크게 한번 하고는 손을 번쩍 들었다. 어디서 그런 무모한 용기가 나왔는지 나 자신도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우선 숨을 가다듬었다. 불현듯 또하나의 운명 앞에 선 나는 한칸한칸 절도 있는 동작으로 크게 허공 재주를 넘으면서 올라가기 시작했다.

무섭다는 원초적인 감정을 채 느낄 겨를도 없이 다음 동작에 집중해야만 떨어져서 죽지 않고 살아서 지구로 귀환할 수 있는 그런 절박한 상황이었다. 어쩌다가 손바닥이 한번씩 미끌할 때마다 내 텅 빈 뇌리 속에는 단지 영어를 못한다는 이유 하나로 온갖 수모를 당했던 힘들었던 순간들이 하나하나 주마등처럼 급하게 스치고 있었다.

그렇다. 단 하나의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그것도 내가 스스로 던졌다. 도저히 중간에 포기할 수는 없다. 그냥 끝까지 올라가는 거다. 다쳐도 좋다. 죽어도 좋다. 저 땅 위의 저 중생들에게 나는 오늘 뭔가를 단단히 보여줘야만 한다.

내가 저들이 오판한 것처럼 그렇게 호락호락하고 물컹한 인간이 아니었다는 것을 오늘 만천하에 당당히 증명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오늘밤 떳떳하게 두 다리를 쭈욱 뻗고 잠을 잘 수가 있다. 분명히 비교적 짧은 시간이었지만, 참으로 많은 생각들이 나의 무거운 잠재 의식 속에서 상당히 바쁘게 교차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덧 나는 다 해냈다. 와우(Wow)하는 동료들의 함성과 박수갈채를 뒤로 하며 나는 상당히 후련한 마음으로 활강 도르래에 체중을 실었다. 지금도 그 기억이 아주 생생한 다분히 극적인 순간이었다. 순간 용기로 향하는 좁은 문의 통과 열매는 과연 엄청나게 달콤했다.

곧이어 마침내 용기를 얻게 된 다른 소대원들도 허공을 향해서 아슬아슬한 오름 재주를 넘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 소대원들 약 40명 중에 절반 정도만이 감히 시도를 감행할 수 있었고, 그 중에서도 오직 절반 정도만이 무사히 정상을 정복할 수 있었다.

나머지는 대부분 그냥 중간 지점의 뻥한 허공 여기저기에 걸려서 더이상 올라가지도 못하고 함부로 내려오지도 못하는 그런 엉거주춤한 비참한 상황들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냥 아예 대놓고 엉엉 우는 친구도 있었고 급한 나머지 바지에 오줌을 질질 싸는 친구도 있었다. 딱했다.

행여나 추락 사고나 날까 봐서 극도로 노심초사하던 드릴 싸전트 보애즈는 바로 밑둥 근처에서 아득한 위를 쳐다보며 바락바락 한껏 악을 쓰고 있었다. 정말로 위험하긴 위험했던 모양이다.






넔두리 둘라 - 고독

기초 군사 훈련 수료식 행사는 비교적 거창했다. 모두들 새벽부터 말끔한 초푸른 예복을 갖춰 입고 뺀들뺀들한 단화를 챙겨 신고서는 마냥들 싱글벙글하며 서성거렸다. 입대 후 처음으로 다소 한가하게들 빈둥거릴 수 있었다. 모두 다들 들뜬 마음이었으므로 한마디로 시끌벅적이었다.

드릴 싸전트 보애즈도 문득 거짓말처럼 한결 부드러운 남자로 다시 변모해 있었다. 문득 나와 눈이 마주친 그가 악수를 청해 왔다. 그는 내 등까지 토닥거렸다. 뜻밖의 따뜻한 행동이었다. 훈련은 훈련 그리고 수료는 수료였다. 솔직히 그제서야, 그가 아주 멋진 인간처럼 보였다.

미리 도열한 사단 군악대의 상쾌한 행진곡에 맞춰서 아주 커다란 잔디 연병장의 한가운데에 질서정연하게 집결하였다. 온갖 고초를 겪으며 그간 갈고 닦아온 각종 단체 묘기들을 한껏 씩씩하게 펼쳐보였다. 물론, 완벽이란 없었다. 약간 엉성했다. 허나 이젠 다 괜찮았다.

저 멀리 관중석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떼거지로 몰려온 훈련병들의 사랑하는 사람들로 가히 인산인해였다. 수천 명이었다. 대견스러워하는 빛이 역력했다. 동료들 거의 다에게 가족이나 친지나 애인 등등 누군가가 왔다. 그리고 그들은 결코 더이상 외로움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동서고금 남녀노소흑백황을 불문하고, 우리네 인간의 사랑하는 마음은 모두가 원초적으로 동일하다는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특히, 북미 대륙 횡단 장거리 여행도 마다 않고 헐레벌떡 달려온 미국인 부모들의 끈끈한 자식 사랑에 경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인간은 다 매한가지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야한 총천연색 사회인 복장 집단의 대규모 출현이었다. 드디어 지루하던 수료식이 끝나고 쓰고 있던 모자들이 한여름의 푸른 하늘로 던져졌다. 화려했던 칼라 대열이 순식간에 무너지면서 우리들의 흑백 대열을 덮쳐오기 시작했다. 인상적인 상봉 장면이었다.

동료들은 다들 좋아서 왁자지껄하게 난리들이었지만 나는 한쪽 구석에서 차분하게 두입술만을 꽈악 깨물었다. 군중 속의 고독 그 자체였다. 북미 대륙의 딱 한가운데에 위치한 이 아득한 오지 육군 훈련소까지 나를 반기기 위하여 달려올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 당시 어쩌면 나는 나만의 고독을 혼자서 즐기고 있었는 지도 모른다. 하나도 슬프다는 기분이 들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앞으로 펼쳐질 미지의 세계에 대한 강한 호기심으로 충만해 있었다고 기억한다. 어차피 혼자 왔다 혼자 가는 인생인데,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넔두리 셀라 - 오판

그로부터 약 6개월 후, 나는 미국 동부 버지니아주의 리 요새(Fort Lee)에서 4개월 동안의 특수 병과 훈련(AIT 즉 Advanced Individual Training)도 모두 무사히 마치고 아주 우연한 기회에 뜻하지 않게 한국으로 파견되어 경기도 부평의 애스캄(Ascom)이라는 조그만 미군 기지 내에 있었던 한 통신 분견대에서 평범한 김 일병(Private Kim)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어느날 내 책상 위에는 미국 국방성에서 날아온 한 통의 편지가 놓여져 있었다. 깨알같은 글씨가 주욱 적혀 있었다. 역시 영어 사전을 들고서는 한줄한줄 찬찬히 읽기 시작했다. 미처 몰랐던 공정한 미국 제도?진면모 하나를 온몸으로 체험하는 순간이었다.

숙독을 끝낸 후 아주 한참 동안, 나는 고요한 사무실에서 두 눈두덩이가 벌겋게 되도록 홀로 많이 울었다. 정의나 공정이나 고진감래와 같은 긍정적인 단어들이 나의 뜨거운 가슴 전체를 한껏 엄습하고 있었다.

한편, 오판이라는 부정적인 단어 하나도 오히려 역설적으로 나를 흥분시키고 있었다. 상당히 오랫동안 전율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았다. 사면초가의 형국에서 멋진 만루 홈런을 치고 천천히 구장을 도는 의기양양한 야구 선수처럼 그저 마냥 통쾌한 순간이었다.

신병 훈련소에서 그렇게도 나를 지독스럽게 못살게 굴었던 드릴 싸전트 보애즈였지만, 훈련 태도 평가(Evaluation) 하나 만큼은 칼같이 공정하게 그리고 참말로 정직하게 제대로 내렸던 것이었다.

우리 훈련 소대원들 중에서 그렇게도 말썽 많은 고문관이었던 나를 상위 5% 안에 드는 우수 훈련병으로 지목했고, 그 결과로 정확하게 기초 전투 훈련 수료일로 소급해서 일계급 특진까지 받는 작은 기쁨도 누리게 되었다. 덕분에, 입대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정말 졸지에 김 상병(Private First Class Kim)으로 불리우기 시작했다. 전혀 뜻밖의 유쾌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하급병에 대한 가히 절대적인 지휘권이 주어지는 역갈매기 세 개의 하사(Sergeant) 이상이 아닌 이병 일병 상병 병장 등 일반 사병들끼리는 절대로 상호간에 어떠한 개인적인 사소한 명령이라도 내릴 수가 없고 그러한 부당한 명령을 따를 필요도 전혀 없는 완전한 평등 관계였기 때문에 부대 근무 중에도 실질적으로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냥 내 계급장만 약간 더 무거워졌을 뿐이었다. 상징적인 변화에 불과했다. 아, 봉급은 약간 더 올랐었다.

우리 사병들은 절대로 입대 날짜별로 선후배를 따지지도 않았다. 아예 그런 개념도 없었다. 계급이 높든 낮든, 나이가 많든 적든, 우리들은 서로 존칭어를 쓰지도 않았다. 영어에는 원래 그런 연장자 존중 장치가 거의 없기도 하다. 그리하여 아무리 잘 모르는 상대를 처음 만나도 마음이 편하고 말하기도 편하다.

은근슬쩍 미리 이것저것 따져보기 위한 탐색전으로 눈치를 볼 필요가 전혀 없다. 그래서 그런지, 여기서는 어느 누구와도 비교적 손쉽게 원만한 의사 소통이 된다. 문득 또는 고의로 잘못 선택된 경칭 때문에 인간 사이에 불협화음이 발생하는 경우는 거의 전무후무하다. 그래서 심지어는 어린애도 쉽게 어른과 서로 말을 트는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꼭 한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있다. 3년 근무가 거의 끝나갈 무렵의 병장들은 명령권을 가진 하사로의 당장 진급(Promotion)을 미끼로 말뚝(Re-Up)을 박으라는 상당히 집요한 인사 담당 장교의 회유를 시간표 짜놓고 여러번 받는다. 많이들 넘어가는 편이다. 20년 이상만 근무하고 은퇴하면 죽을 때까지 일정한 액수의 군대 은퇴 연금도 가외로 나오므로 그 유혹이 여간 만만하지 않다.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대부분 일반 미국인들의 똑부러지는 책임 완수 성향에 관해서다. 아무리 헐렁하고 바보스럽게 지내던 병장 녀석이더라도 일단 그런 식으로라도 진급하여 하사관 계급장만 달고 나면 그 인간의 모든 수동적인 근무 태도가 정말로 하루아침에 딱 소리나게 능동적으로 변하게 된다.

모자를 씌워주면 언행이 변하는 격이다. 거의 다가 주어진 임무 수행 및 하급병 지휘권 행사를 거의 200% 완벽하게 해내는 깐깐한 모범 상관이 되는 것이다. 주어진 목숨 담보 책임감의 중요성을 실감하기 때문이라고 나름대로 생각해 봤다. 한두번 목격한 일이 아니었다.






넔두리 넬라 - 귀향

리 요새에서의 특수 병과(MOS 즉 Military Occupational Specialty) 훈련이 거의 끝나갈 무렵, 다들 자대 배치 명령서를 받고 있었다. 거의 대부분이 입대 계약 당시의 희망 근무지에 따라서 세계 각지의 다양한 부대로 발령나고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잠자코 있었다. 어느날 담당 상관 하나가 나를 불러세웠다. 어디로 갈 꺼냐고 물었다. 당연히, 모른다고 했다. 왜 모르냐는 것이었다. 하도 멍청하니까 답답한 모양이었다.

한국 사람이냐고 물었다. 한국으로 가고 싶냐고 물었다. 정말 그럴 수도 있는 거냐고 되물었다. 바보처럼 느껴졌다. 시민권이 있느냐고 물었다. 비시민권 한국인을 한국으로 파견하면 국제적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있으므로 원하면 미국에서의 체류 기간에 관계 없이 시민권을 주겠다고 했다. 그리하여, 그 자리에서 직접 시민권 신청서를 작성하여 제출하고서는, 며칠 후 졸지에 한국으로 가는 군용 비행기에 몸을 싣게 되었다. 꿈만 같던 일종의 부메랑 여정이었다.

가고 있었다. 돌아가고 있었다. 꿈에도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귀향길인 셈이었다. 잠시, 뜻밖의 행운이라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자유인이 아니었다.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어야만 하는 군인이었다. 그것도 미국의 군인이었다. 그러나 다른 곳도 아닌 바로 내가 태어난 한반도를 지키기 위해서 가고 있었으므로 뿌듯하기도 했다.

일단 서울의 미 8군(8th Army) 용산 기지 안에 있던 임시 집결 부대에 떨어졌다. 마치 생선 가게의 생선들처럼 이리저리 거의 무작위로 정신없이 팔려나가고들 있었다. 많은 대기 장병들은 혹시나 휴전선 비무장 지대 즉 DMZ(DeMilitarized Zone)의 철책 경계를 맡은 미 육군 제2사단(U.S. Army 2nd Division)으로 빠질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며칠 후, 나는 경기도 평택 기지의 조그만 통신 중대 사무실에 도착했다. 마음씨 넉넉하게 생긴 뚱뚱한 흑인 특무 상사(First Sergeant)가 대뜸 내 고향을 물었다. 서울 태생인데요. 그런데 왜 하필이면 이런 촌구석으로 왔느냐고 그는 내게 호탕하게 웃으면서 기분 좋은 핀잔을 주었다. 감이 좋았다.

특별히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내 고향 근처의 자리를 알아보겠다고 그는 이리저리 꽤 오랫동안 전화질을 해댔다. 서울은 아니지만 부평에라도 갈래? 그럼요. 될 수만 있다면 고향이나 그 근처에서 근무하고 싶어하는 인간 귀소 본능을 잘 이해하는 진솔한 직업 군인이었다. 풀려던 짐을 다시 들고서 부평행 군용 찦차에 몸을 실었다.

부평 기지 즉 애스캄에서의 13개월 통신 분견대(Communications Detachment) 생활은 상당히 즐거웠다. 우선 사람들이 좋았다. 나를 포함한 약 8명의 미군들이 수십 명의 한국 민간인들과 함께 축구장 만큼이나 커다란 통신 장비 창고 서너 개를 관리하는 비교적 손쉬운 일이었다. 주중의 하루 8시간 근무 외에는 몽땅 자유 시간이었다.

날이면 날마다 창고 바닥에 쌓이는 허연 비둘기 똥을 치워야만 했던 한국 아저씨들의 노고를 덜어준답시고 흑인 녀석 하나가 마구 사냥총을 발사하여 낡은 창고 지붕에 수많은 구멍들을 뚫은 우직한 사건이 있었다. 물론, 아리클 휲틴 징계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그래도 희희낙락이었다.

따끈한 난롯불 곁에 모였던 우리 아저씨들도 그날 잡힌 비둘기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바로 곁에 있던 주류 창고 아줌마들이 가져온 양주까지 홀짝거리면서 구수한 비둘기 구이를 안주 삼아 흥겨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 엉뚱한 비둘기 사냥꾼도 물론 초대되었던 조촐한 자리였다.

그런데 그 양주 창고 아줌마들의 섬세한 균형 감각은 정말로 대단한 수준이었다. 한국 내의 각급 미군 부대에서 판매 소비되는 모든 양주들은 일단 그곳에 모였다가 흩어지고 있었다. 인천항을 통하여 들어온 술들이 대형 트럭으로 그곳에 도착하면 일단 그 많은 아줌마들이 각자의 머리에 한 상자씩을 이고서는 하역 작업을 했다. 순식간에 뚝딱이었다. 마치 부지런한 개미 행렬처럼 볼 만한 풍경이었다.

그 아줌마들의 또하나의 임무는 머리에 이고 있던 그 상자 속에 과연 약간 덜 찬 술병이 있는가 하는 것을 그들만의 균형 감각으로 알아내는 흥미로운 일이었다. 멀쩡한 상자를 뜯지 않고서도 행할 수 있는 일종의 품질 관리(Quality Control) 기능이었다. 그녀들은 과연 쪽집게였다. 물론, 그런 식으로 기차게 발견되는 불량 양주들은 자신들의 몫이었고 더러는 우리에게도 주고는 했다.






넔두리 달라 - 군상

한번은 보기 싫었던 군상을 보기도 했다. 어느날 근무를 마치고 샤워를 하고서는 달러를 한화로 바꿔서 서울로 외출하기 위하여 우선 애스캄 영내의 조그만 클럽으로 들어갔다. 그런 다소 후진 술집도 소위 미 8군 무대의 하나였다. 한국 가수들이 공연하고 있었다. 물론, 내국인은 출입 금지였다. 그런데 거기서 왁자지껄하고 있던 한무리의 한국군 장성들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런 지도자급 인사들이 한가하게 술 마실 장소가 아니었다. 별들이 아까웠다.

영내 규칙을 어기면서까지 모종의 편법으로 입장한 것이 틀림없었다. 같은 한국인으로서 심히 쪽팔렸다. 카운터 한쪽에 잔뜩 쌓여있던 공짜 칸덤(Condom)들을 그쪽으로 휘익 집어던지고 싶은 못된 마음도 엄습했다. 더우기 클럽 앞에 주욱 늘어선 한국군 차량들의 한쪽 곁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초라한 운전병들을 보는 순간, 또 뭔가가 우우욱 치밀어 올랐다. 운전병들이 그들의 노예들인가? 너무 치사한 인간들이라고 생각했다. 먹으려면 같이 먹고 마시려면 같이 마탑償? 저게 대체 무슨 해괴한 꼴인가? 물론, 운전병들이 술을 마시면 안되지만서도 말이다.

나는 영내에 있던 미군 헌병대 막사의 허름한 방 하나를 빌려서 썼다. 한국군에서 차출된 소위 카투사(KATUSA 즉 Korean Augmentation To the U.S. Army) 출신 헌병들과도 자연히 꽤나 친하게 지냈다. 그들은 봉급을 제외한 모든 의식주 면에서 일반 미군 헌병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으며 동일한 시간제 근무를 하고 있었다. 입는 것도 먹는 것도 사는 것도 거의 차별이 없었다.

많은 카투사들은 영내에서 허구한 날 무료로 상영되는 수많은 할리웃 영화들을 관람하고 있었다. 물론, 무료한 시간을 재미있게 때우려는 방편이었다. 하지만 더러는 영어 회화 하나를 확실하게 배워나가기 위하여 착실한 노력을 경주하는 현명한 친구들도 눈에 띄었다. 그런 실한 친구들은 한결같이 꼬지리하게 된 조그만 영한 사전 하나씩을 꼭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인상적이었다.

한편, 좋지 않은 일을 밥 먹듯이 하던 동료 미군들도 있었다. 그 잘난 영어를 직접 가르쳐준다는 명목으로 여대생들을 꼬셔서는 상습적으로 따먹는 백인 친구도 있었다. 너무나 쉽게 그 한심한 녀석에게 걸려드는 서울 여성들을 보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의 자랑을 들어보면 과연 한둘이 아니었다. 뭣도 모르고 막 덤벼드는 철부지 불나방들 같았다. 대단히 괘씸한 녀석이었다.

부대 앞의 미군 전용 클럽에 무단 입장을 해서 양주 달라고 소란을 피우던 바로 곁 부대인 부평 공수 부대의 만취 사병과 쌈박질을 한 끝에 급기야는 그의 코를 깨진 병으로 무참하게 화악 그어서 잘라버리고는 영내로 도망 들어온 흑인 친구 때문에 우리 분견대는 물론 전 기지가 발칵 뒤집힌 적도 있었다. 그는 약 한달 동안을 무서워서 벌벌 떨며 외출도 못하고 있었다. 부대 앞에 교대로 진을 치고 기다리던 살벌한 공수 부대 장병들 때문이었다. 얼마나 가슴들이 아팠을까?

분명히 흉악 폭력 범죄였는데도 불구하고, 영내의 미군 헌병대는 물론 우리 분견대와 평택 중대 본부의 책임 장교들까지도 그 흑인 친구의 체포와 구속은 커녕 안전과 보호를 위하여 오히려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분명히 옳지 못한 일이었다. 졸병인 나로서는 도저히 어찌할 수가 없는 입장이었다. 결국, 그 녀석은 대형 운송 트럭에 실린 커다란 통신 장비 속에 숨겨져서 부대 앞을 무사히 통과하여 평택 중대 본부로 후송되었고 곧바로 미국으로 보내졌다. 부끄러운 처사였다.

각종 마약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푸욱 찌들어서 한없이 망가진 세월을 보내는 한심한 친구들이 너무 많았다. 거의 다들 가벼운 마리와나로 시작해서 급기야는 그걸로 양이 차지 않게 되므로 곧바로 다른 독한 마약들에 손을 대게 되는 경우였다. 그 중독 경로는 손바닥에 있는 손금과도 같이 상당히 빤했다. 눈의 촛점이 풀린 몽롱한 상태로 하루하루를 연명했다. 도저히 군인이라고 여길 수가 없었다. 총을 들고 전쟁을 치를 수 있는 전사들이 아니었다. 분명한 오합지졸이었다.






넔두리 열라 - 행복

사실 군대에서는 가외로 돈 쓸 일이 별로 없었다. 의식주가 거의 모두 공짜로 해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새로운 군복과 군화를 살 돈도 매월 조금씩 따로 주었다. 군대 음식도 전혀 불만이 없었다. 거의 매일 새로운 메뉴의 맛좋은 고급 음식들이 배불리 제공되었다. 부대 내의 주거 환경도 상당히 깔끔했다. 결혼한 장병에게는 영외 거주 생활비까지 따로 지급되었다. 지금 와서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그 내게는 운명적이었던 지원병 모집 광고가 결코 허위는 아니었다.

그리하여 술 담배 여자 하지 않으며 훈련 첫날부터 꼬깃꼬깃 모은 현찰 봉급이 거금 삼천 불이나 되었다. 뜻한 바가 있어서 거의 한푼도 함부로 쓰지 않고 꼭꼭 모아온 짠돌이 작전의 결과였다. 귀향하자 마자 몽땅 털어서 서울 근교에 누추하지만 조그만 집을 하나 살 수 있었다. 방이 세 개나 있고 커다란 마루에 마당에 장독대까지 있는 집이었다. 기른 정에 대한 은혜를 갚으려고 그냥 드렸다. 초여름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날, 부평의 막사에서 내가 쓰려고 장만했던 TV까지 기꺼이 갖다가 드렸다. 그리고는 많이많이 울었다. 왜 그랬을까? 너무나 행복했기 때문이다.

지난 1976년 여름 그 유명한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이 발생했다. 경계 시야를 가리던 무성한 나뭇가지들을 자르려던 미군에게서 도끼를 빼앗은 북한군이 무참한 살인을 저지르고 말았다. 대단한 벼랑 끝 대치 상황이 연출되었다. 한반도는 다시금 전쟁의 도가니로 빨려들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분견대에는 총이 없었다. 총이 없는 군인은 군인이 아니었다. 웃기는 일이었다.

우리는 급기야 비상 연락망을 만들기 시작했다. 평택 중대 본부로의 철수 내지는 피난 계획도 치밀하게 세웠다. 여차하면 누가 누구에게 연락하고 누가 어떤 트럭을 몰고 누구네를 찾아가서 누구들을 데리고 언제 어디로 모여서 어디로 떠난다는 식이었다. 그 세부 계획에는 우리 미군들과 직계 가족들은 물론 우리 한국인 아저씨 아줌마들도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는 진짜로 전쟁이 터지는 줄로만 알았다. 그 당시의 상황은 그만큼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때의 초긴장 비상 사태는 오래가지 않았다. 곧 다시 평화로운 시절이 도래하였다. 잠시의 외출 금지령도 풀렸다. 거의 매일 근무 후에는 서울행 열차나 전철이나 고속 버스를 타고 그리운 고향 친구들을 만나러 다녔다. 예전에 다니던 학교를 찾아가서 이것저것 도강을 하는 재미도 제법 쏠쏠했다. 물론, 그 덕분에 남녀 대학생 미팅에도 여러번 자연스럽게 참석할 수 있었다. 다시금 예전의 학창 시절로 돌아간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상당히 행복한 나날이었다.

한편으론, 엉뚱한 유혹을 받기도 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미국에 오려는 사람들이 유난히 많았던 시절이었다. 부대 사무실의 친한 아줌마 하나가 조용히 상의를 해왔다. 아는 친구 하나가 꼭 미국으로 가고 싶어하는데, 어떻게 김상병이 좀 도와줄 수 있겠수? 어떻게요? 결혼하면 되잖아. 예, 결혼이요? 그래, 위장 결혼. 아유, 어떻게 그런 걸. 아이, 만 불이나 준데. 아이구, 전 그런 데 전혀 관심이 없구만유. 웬만한 새 차 한 대가 삼사천 불 할 때니까 만 불이면 꽤 큰 돈이었다. 하지만, 그깟 돈 만 불에 내 인생의 출발점을 팔고 싶지는 않았다. 깨끗하게 단칼로 거절했다.

한국 근무 중에 갑자기 하와이에 갈 일이 생겼다. 그곳의 법정에서 시민권 판사가 부르고 있었다. 부대에서는 업무 출장으로 해주면서 군용기까지 태워줬다. 서류 검토를 마친 나이 지긋한 백인 판사는 대뜸 백지를 내주며 하늘은 푸르다(The sky is blue.)를 써보라고 했다. 그게 시민권 시험의 전부였다. 증인이 있나요? 없는데요. 미국 이름 갖고 싶나요? 그래도 되나요? 자, 딱 두 시간 줄 테니까 어찌해서든 증인 두 명과 원하면 미국 이름 하나 만들어 돌아와요. 황당했다.

그러나 궁즉통이었다. 법정 앞길에서 아무런 대책도 없이 마냥 서성거리던 나는 마침 그곳을 통과하던 동양인 노부부를 발견했다. 참 고마운 그분들의 이름은 지금도 멘도사라고 기억한다. 내친 김에 이름도 하나 가장 흔하고 부르기 쉬운 것으로 장만했다. 거의 얼떨결에 그 자리에서 시민권을 받아든 나는 곧장 멋진 와이키키 해변으로 나갔다. 쏟아지는 태양을 맞으며 또하나의 망중한을 즐겼다. 많은 생각들이 교차되고 있었다. 나의 나라가 졸지에 둘이 된 셈이었다.

어느덧 검붉은 석양마저 사라지고 있었다. 백인 신사 하나가 다가왔다. 옆에 좀 앉아도 되나요? 그러세요. 낭만적인 해변 벤치의 저쪽 끝에서 이러쿵저러쿵하던 그가 슬금슬금 내 곁으로 아주 가까이 접근했다. 느닷없이 그의 징그러운 손이 내 무릎 위를 타고 올라왔다. 어, 왜 이러세요? 이런 거 좋아하지 않나요? 아이고, 걸음아 날 살려라 하면서 제시닥 묵고 있던 유스 호스텔로 돌아왔다. 천만뜻밖의 일이었다. 물론, 게이가 뭔지도 몰랐다. 미국 이민 1년 남짓의 일이었다.






넔두리 일라 - 개판

부평 애스캄에서의 산뜻한 근무를 모두 마치고 북미 대륙 정중간에 위치한 캔자쓰주의 라일리 요새(Fort Riley)에 도착한 나는 자대 배치를 위한 대기실에서 의기소침한 채로 멍하니 앉아만 있는 한 한국인 사병을 발견했다. 나처럼 막 한국 근무를 끝마치고 도착한 터였다. 어디서 근무했어요? 알아서 뭐해요? 왜요? 말하기도 싫어요. 왜요? 고생만 죽도록 했어요. 도대체 어디서요? 미 2사단 소속으로 철책 근무만 진량 하다가 왔어요. 서울 구경 딱 두번 했구만요. 머쓱해진 나는 상대적인 미안감으로 어쩔 줄을 몰랐다. 그후 나는 그와 아주 가깝게 지냈다.

그 당시 그곳의 미 1사단에는 한국인 장병들이 대략 스무 명 정도 되었다. 대부분 한국이나 서독 등 외국 근무를 마친 우리는 상당히 친하게 지냈다. 사면팔방으로 끝도 없이 펼쳐져 있는 밀밭과 옥수수밭으로 둘러쌓이고 변변한 언덕배기도 하나 없는 허허벌판에서 저녁마다 별로 할 일이 없던 우리는 제대할 때까지 늘 같이 50전짜리 영내 영화 보고 구멍 당구나 볼링 치고 시원한 맥주 마시고 24 시간 여는 구내 식당에 가서 이것저것 밤참 먹는 일로 소일하고 지냈다. 마치 다람쥐가 정해진 공간에서 한없이 쳇바퀴만 도는 격이었다. 너무나 황량하고 외로운 곳이었다.

항상 즐거운 얘기 꽃들이 피었다. 하루는 한국 근무 중에 돈 번 얘기들을 했다. 미군 부대 식당 요리병으로 일하면서 쓰레기통에 꼬불쳐 버리던 멀쩡한 치즈 덩어리들로 푼돈 챙긴 얘기며, 각종 보급 물자들을 뒷구멍으로 팔아서 용돈 챙긴 얘기 등등 다양했다. 나같은 바보만 몰랐던 일이다. 내 주특기(MOS 즉 Military Occupational Specialty)가 보급(Supply)이라는 걸 아는 친구들이 물었다. 어떻게 돈 좀 벌었어요? 아뇨. 아니, 보급병 아니예요? 그런데요. 바보처럼 느껴졌다.

하루는 직속 상관인 흑인 하사가 묵직한 20불짜리 뭉치 대여섯 개를 내게 건네면서 잠시 보관해 달라고 했다. 다소 움찔했다. 꽤나 큰 돈이었다. 앞으로도 계속 들어올 것이라고 했다. 자세한 내역을 물었다. 알고 보니, 부대 바로 앞의 조그만 군인 도시인 졍끄션 씨리(Junction City)에서 저녁마다 포주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제서야 궁금증이 하나 풀렸다. 어쩐지 웬만한 장교들도 평소에 이 녀석 앞에서는 꼼짝도 못하는 편이었다. 내게 공범이 되자는 소리였다. 사양했다. 그 댓가인지 마구 힘든 일을 시키려고 했다. 당당히 거역했다. 그래도 그는 내게 꼼짝 못했다.

캔자쓰의 여름은 무척이나 무더웠고 겨울은 무척이나 추웠다. 북극해에서 멕시코만까지 변변한 장애물도 없는 북미 대평원의 한중간에 있었으므로 북남으로 퍼엉 뚫린 대통로를 통하는 각종 대자연의 광기를 맛볼 수 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토네이도(Tornado) 경보만 울리면 동작 그만 상태로 재빨리 건물마다 집집마다 있는 지하실에 숨어야 했고, 큰 눈만 오면 곧잘 고립되곤 했다.

지난 1977년 6월 중순경의 일이었다. 이젠 완연한 여름이었다. 모두들 여름 야영 훈련 나갈 준비를 마치고는 일찌감치 잠을 청했다. 다음날 이른 새벽, 먼저 일어나서 커튼을 젖히던 흑인 동료 하나가 꺄악 하며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바깥은 온통 하얀 설경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눈 앞이 캄캄해졌다. 눈밭에서 자야할 판이었다. 과연 단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변화무쌍한 그곳 날씨의 장난이었다. 모두들 훈련 계획이 취소되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그러나 용감스러운 대대장은 훈련을 고집하였고 우리는 다들 엄청 투덜거리면서도 하얀 눈밭으로 진군해야만 했다.

밤새 온 눈은 무릎까지 빠질 정도였다. 깔린 눈을 대강 치우고서 2인용 텐트들을 쳤다. 북극 탐험을 하는 기분이었다. 꿈 속과도 같이 아늑하고 멋진 환경이었다. 그러나 오래가지 않았다. 역시 다시 급히 더워지던 날씨 관계로 점심 때도 되기 전에 사방은 온통 진흙 쑥대밭으로 변했다. 뭐든지 푸욱푹 빠지는 바람에 한발짝 움직이기도 힘들었고 각종 보급 차량들도 속수무책이었다. 미리 계획된 야외 전투 훈련은 커녕 끝도 없이 엉겨붙는 진흙과 싸우느라고 모두 정신이 없었다. 물론, 앞으로 사흘밤이나 지내야 될 텐트들도 엉망진창 개판이 되고 말았다. 아수라장이었다.






넔두리 끌라 - 정의

그날밤 질컥한 맨땅에서 올라오는 한기 때문에 초여름인데도 불구하고 거의 다들 오들오들 떨면서 자느라고 난리들이었다. 물론, 텐트 안 바닥에 군용 비옷인 판초(Poncho)를 깔고 그 위에 군용 공기 요(Air Mattress)를 깔지만 거의 다 불량품이었던 고로 약 30분만 지나면 푸욱 갈아앉으므로 다시 일어나서 입으로 불고 잠깐씩 자든지 아니면 그냥 무시하고 침낭(Sleeping Bag) 속으로 번지는 차가운 땅기운과 씨름하며 새우잠을 잘 수 밖에 없었다. 허나 나는 달랐다.

그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나는 느긋하게 포근한 침낭 속에서 긴 단잠을 잘 수가 있었다. 그런 하나도 쓸데없던 공기 요의 맹점을 일찍부터 간파한 나는 나름대로의 나홀로 대책을 세워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몸무게를 견디면서 침낭과 판초 사이에 일정한 공기 공간만 아주 확실하게 확보하면 되는 다소 간단한 일이었다. 보급 창고 쓰레기통에서 주워온 빈 상자(Cardboard Box)를 잘라서 네 토막으로 접을 수 있게끔 고안했다. 찬 기운 차단 기능은 만점이었다. 금방 입소문이 퍼졌다. 그후 많은 동료들이 나처럼 기꺼이 거지같은 차단 종이 요를 갖고 다녔다.

부연하지만 캔자쓰의 겨울은 장난이 아니었다. 엄청 추웠다고 기억한다. 도저히 사람이 살 데가 아니었다. 한번은 심한 독감이 걸렸는데 그게 그만 지독한 기관지염으로 번지고 말았다. 다행히 폐렴까지 되지는 않았지만 하여간 따뜻한 막사 안에서 꼼짝도 못하며 약 한달을 지낸 적이 있다. 군의관의 명령으로 찬 공기를 접하면 안되었으므로 오륙백 명이 한꺼번에 맘껏 먹을 수 있는 최고급 대형 부페 스타일 식당(Mess Hall)에도 가지 못했다. 그래서 소대원들이 교대로 음식을 싸다가 주곤 했다. 지금은 이름이나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고마운 친구들이었다. 드디어 캔자쓰를 아주 떠나오던 비행기가 이륙할 때 조용히 결심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고.

이 글로 인한 일말의 오해도 남기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한마디 하겠다. 거의 순전한 내 개인 경험 기억에 의존하여 썼기 때문에 물론 다른 이들과의 비슷한 경험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을 수도 있겠다.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실, 보잘 것 없는 내 운명을 바꿔놓다시피 했던 그 당시의 그 요상했던 구인 광고의 사탕발림 내용들 중에 허위였던 것은 하나도 없었다. 복무 중에는 공짜로 사랑니들 뽑는 수술까지 받았고, 정확히 3년만의 명예 제대(Honorable Discharge) 후에는 그 당시의 소위 지아이(GI 즉 Government Issue) 빌(Bill)에 의거한 군대 장학금으로 딱 4년만에 원하던 대학 공부도 모두 마쳤다. 물론, 산영어도 배웠다.

내 미국 인생 여정에 중요한 디딤돌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느 누구에게도 절대로 미군 입대를 권고하고 싶지가 않다. 계획된 거짓말 또는 거의 완벽한 엉터리 대의명분을 바탕으로 한 결코 떳떳하지 못한 이라크 전쟁 등등에 참여하여 반인륜 범죄자 즉 비참한 전범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솔직한 심정이다. 더우기, 적어도 그 당시의 미국 군대는 결코 정숙한 여자들이 갈 데가 아니었다. 내가 본 대부분의 여군들은 참으로 헤펐다. 저녁마다 여군 막사 앞에는 남군들이 우글거렸다. 주말이면 여군 막사의 대부분은 밤새도록 거의 다 텅텅 비어 있었다. 그들이 어디 가서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 지는 그냥 상상에 맡기겠다. 사실이었다.

누구나 다 그렇겠지만, 밤하늘의 별들처럼 많은 지나간 군대 얘기들을 나름대로 주절대다가 보면 정말 밑도 끝도 없으므로 이만 각설하고, 하여간 결국, 마치 한마리의 새끼 호랑이와도 같이 한껏 나약했던 하찮은 나를 더욱 강인하게 훈련시키기 위하여 애초부터 졸지에 벼랑 밑으로 화악 밀쳐버림으로써 일부러 온갖 고초를 다 겪으면서 혼자서 악착같이 기어오르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하게 했던 그 무서운 호랑이 드릴 싸전트 보애즈의 깊은 뜻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나로서는 그에 관한 한 처음부터 끝까지 아주 완벽한 오판을 한 셈이었다. 역시,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옛말이 꼭 들어맞았던 것이다. 그는 결국 내가 미국에서 만난 정말로 대단한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거시적으로 보면, 미국이라는 거대한 수레바퀴는 사회의 거의 모든 분야에 수도 없이 확고하게 포진하고 있는 그러한 깐깐하고 정의로운 사람들에 의하여 계속해서 쉬지 않고 조금씩 앞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게 바로 이 사회의 저력이다. 지금이야 극도로 우매한 최고 지도자 한사람 때문에 잠시 여러모로 주춤 또는 후퇴하고 있는 지경이지만, 곧바로 다시 힘차게 전진할 것이다. 분명히 지금은 약간의 거국적인 인내심이 필요한 시기다. 그러나 시간이 반드시 해결할 것이다. 또하나의 오판은 결코 아니라고 단호하게 확신한다. 이 사회의 저력을 굳게 믿기 때문이다.

Thanks, Mr. Boaz. If we ever meet again, let’s have a nice drink.

고맙습니다, 보애즈씨. 우리 언젠가 다시 만나면, 술이나 한번 멋지게 합시다.